2011년 가을의 한국 방문은 여러 가지로 뜻이 깊었었다.
내가 살고 있는 이곳 뉴질랜드에도 가을이 있고 또 나름대로의 가을 정취가 있지만 계절의 변화가 한국만큼 확연하지 않기에 때로는 한국의 가을이 못 견디도록 그리웠다. 그래서 2011년에는 아주 마음 먹고 한국 방문의 시기를 가을로 잡았고 또 간 김에 아예 연말연시를 한국에서 지내며 그 동안 잊었던 고국의 세모와 세초를 큰 딸네 가족과 친척들 그리고 친구들과 같이 보내기로 작정했었다.
11월 한국의 가을은 생각보다 아름다웠다. 늦가을 단풍은 마지막 색깔 잔치를 아낌없이 베풀어 주었고 이렇게 까지 높고 푸르렀나 옛 기억을 의심할 정도로 하늘은 청명하였고 코 밑을 스쳐 지나가는 삽상한 바람은 그 산뜻한 촉감과 더불어 지나간 추억들을 모두 몰고 와서 머릿속으로 가슴속으로 밀어 넣고 그때마다 한바탕의 회오리를 일으키며 온몸을 감쌌다.
가까운 산으로 잘 가꾸어놓은 산책로들로 그리고 고궁들로 아내의 손을 잡고 가을 정경들을 찾아 다니며 늦가을 정취를 만끽하는 사이에 어느덧 11월이 지났고 거리에 나서면 찬바람이 양 볼을 때리는 12월이 되었을 때 아하 겨울이 왔구나 하는 자각과 더불어 가을 환상에서 깨어나며 그간 못 만났던 친구들이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고국을 떠나 이곳 뉴질랜드에서 사는지가 어언 20년이 넘었지만 거의 한 해도 빠지지 않고 매년 한국을 방문했다. 그렇게 빠짐없이 갈 수 있었던 것은 떠나와 살고 있으면서도 항시 그립기만 한 고국에 대한 향수 때문이기도 하지만 갈 때마다 변함없이 나를 반겨주는 친구들이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한국의 삶은 바쁘다. 모든 것이 느리고 급할 것이 없는 이곳 뉴질랜드 생활에 익숙해진 나에게 뜀박질하듯 달리지 않으면 궤도에서 떨어져 나갈 수 밖에 없는 한국의 삶은 현란하기만 하다. 그렇게 바쁜 와중에서도 내가 온 것을 알면 만사를 제쳐놓고 모임을 주선하고 또 따로 시간을 내서 기쁘게 나를 만나주는 친구들에게 나는 항시 감사한다. 베풀어준 그들의 우정을 어떻게 서라도 갚고 싶어 한국을 떠날 때에는 그들에게 시간 좀 내서 뉴질랜드에 오라고 부탁하지만 이 먼 남쪽 나라에 오는 것이 그렇게 쉽지 않은지 이제껏 이곳에 왔다간 친구 부부들이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이제 모두가 은퇴할 날이 가까워오니 그때엔 시간적 여유가 생겨서 모쪼록 많은 친구들이 이곳에 오면 그 동안 입었던 사랑을 갚을 기회가 많아지지 않을까 생각한다.
2011년 그 겨울에도 많은 친구들을 만났지만 그 중에 특별히 기억나는 모임중의 하나가 대학 동창들과의 모임이다. 대학 때 가장 친하게 지냈던 표완수 동문이 내가 가면 친구들을 불러모아 모임을 만들곤 하는데 그 해 겨울엔 내가 한국에 오래 머문다고 두 번이나 모임을 주선했다. 완수는 대학 졸업 후 언론계에 투신하여 YTN 사장까지 지내고 지금은 국내제일의 시사평론지 시사 IN의 사장직을 맡고 있다. 호방한 성격에 푸근한 말투로 재미있게 좌중을 사로잡기에 그가 있는 모임엔 항시 풍류와 따뜻한 정이 흐른다.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들과의 대화는 40년 지난 세월을 종횡무진으로 치달으며 주고받는 술 잔과 더불어 이 친구 저 친구의 입으로 이어진다.
12월도 중순이 넘었을 때 완수가 두 번째 모임을 주선했다. 인사동 뒤 편 종로경찰서에 가까운 아담한 한식집에서 모임을 가졌다. 해마다 만났고 특히 그 해에는 두 번째 만나는 대학 동창들이었지만 모임에 나온 동문 한사람 한사람 모두가 그렇게 귀하고 또 가깝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서로 덕담을 주고 받으며 이야기가 다시 옛 동숭동의 대학로로 돌아가 대학천의 미라보 다리(대학로와 학교 교정을 이어주던 작은 다리를 학생들이 그렇게 불렀다) 이야기가 나왔을 때 문득 이영준 동문이 입을 열었다. 영준은 외교관 출신으로 대사까지 지낸 친구지만 평소에 말이 많지 않고 조용하다. 그렇기에 그가 입을 열자 모두가 주목했다.
영준은 최근 시인 백석의 시(詩)에 빠져있다고 했다. 그리고 그 시인을 그렇게도 사랑했던 기생 자야(子夜)와의 애절한 사랑 이야기를 해주었다.
기생 자야(子夜)를 사랑했던 백석, 그리고 북으로 가서 평생 다시 돌아올 수 없었던 백석을 기다리며 외로움과 사랑을 연약한 여인의 가슴으로 굳굳이 지켜내며 우리나라 제일의 요정 대원각을 세우고 말년에 요정은 길상사(吉祥寺)에 시주하고 또 2억원의 현금을 백석문학상으로 내놓았던 비련의 여인 자야. 보통 사람의 계산으로는 헤아릴 수도 없는 엄청난 돈을 미련 없이 내어놓은 것이다. 평생 벌었던 돈이 아깝지 않느냐는 질문에 '그깟 돈 백석의 시 한 구절만도 못하다'고 대답한 사랑의 여걸이다. 이런 사랑의 이야기를 하면서 영준은 백석의 대표 사랑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라는 시를 그 자리에서 암송했다. 그 시도 좋고 또 옛 시인과 기녀의 애절한 사랑이야기도 가슴에 와 닿았지만 내게 더욱 귀하게 느껴진 것은 이제 60의 나이도 중반을 향해 가는 내 친구의 가슴속에 그렇게도 순순하고 뜨거운 면이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시를 다 암송한 영준을 바라보며 아직도 대학에서 영문학을 가르치고 있는 최준석교수가 한마디 했다. '자넨 이제부터 새로 문학을 해도 되겠네."
참 너무도 귀하고 자랑스런 내 친구들, 이런 친구들이 언제든지 두 팔 벌려 나를 맞아주고 포용해주기에 20년이 지나도 아니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나의 한국 방문은 계속될 것이다.
머리엔 흰 서리가 내리기 시작했지만 가슴은 뜨겁기만 한 내 친구 영준이 암송했던 백석의 시를 보자.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백석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 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아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를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뱁새)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오막살이집)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디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2014.11.30
석운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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