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6월이다.
한국으로 치자면 12월인 셈이니 남반구의 작은 나라 뉴질랜드에 본격적으로 겨울이 시작되는 달이다. 이 땅에 와서 산 지 벌써 20년이 훌쩍 넘지만 아직도 달이 바뀌면 한국으로 치면 몇 월인데 하고 마음속으로 생각한다. 태어나고 자라난 조국은 우리가 알든 모르든 우리 모두의 가슴속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다는 또 하나의 작은 증거가 아닌가 한다.
지난주 내내 하루가 멀다 하고 비가 왔다. 이미 떨굴 만큼 잎사귀들을 떨구어낸 가을 나뭇가지들을 흔들어대듯 추적추적 그렇게 비가 왔었다. 아직도 미련을 버리지 못한 가을 햇살이 이따금은 하늘 가득히 밀려다니는 먹장구름 속에서 빠끔히 얼굴을 내밀기도 했지만 당당하게 달려오는 겨울에게 가을은 자리를 내주어야만 할 것 같았다. 오늘 벌써 유월에요 라고 아침 식탁에서 아내가 말했다. 그렇게 말하는 아내의 목소리에서 난 가을 숲 속을 살랑거리는 작은 바람 소리를 들었다. 그러기 말이오 라고 답하며 나는 아내의 큰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아내의 동공 깊은 곳에서 바람에 흩날리는 작은 가을 이파리들이 어른거리는 것 같았다. 무얼 그렇게 보세요 라고 묻는 아내에게 나는 대답 대신 미소를 흘렸다.
아침밥을 먹고 서재로 올라와 책상 앞에 놓인 달력을 한 장 넘기며 고개를 들었을 때 문득 창밖으로 보이는 하늘이 의외로 푸르렀다. 오늘은 날씨가 좋은가 보다 하고 창가로 다가갔을 때 창을 넘어들어오는 아침 햇살이 생각보다 따사로웠다. 햇볕에 이끌리듯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 하늘을 우러렀을 때 하늘엔 희디흰 뭉게구름이 군데군데 무리 지어 떠 있었다. 날씨에 따라 사람의 기분이 변할 수 있다더니 그날 아침 내가 그랬다. 어젯밤까지 끈질기게 내리던 비 때문에 공연히 마음이 무거워져 책도 손에 잘 안 잡혔었는데 오늘 맑은 하늘에 빛나는 햇볕을 대하니 기분이 상쾌해졌다.
마치 한국의 유월 초 날씨 같네 라고 나는 혼자 중얼거렸다. 그동안 기후가 많이 변해서 요즈음 한국 유월의 날씨가 어떤지는 자신이 없지만 이민 오기 전 20여 년 전의 한국 유월 초의 날씨는 아주 좋았던 것으로 아직도 기억한다. 보통 장마가 시작되는 것이 유월 하순부터였으니 유월 초까지는 늦은 봄과 초여름 날씨가 교차하면서 따뜻하면서도 상쾌한 날씨가 이어졌던 것으로 기억한다. 책상에 앉아 창밖을 내다보며 불어오는 바람과 반짝거리는 햇볕 속에 살랑거리는 나뭇잎들을 바라보다가 나는 어느덧 20여 년 전의 한국의 유월로 돌아가고 있었다.
옛날에 유월의 아침을 소재로 써놓은 시가 하나 있었는데……. 문득 먼 기억의 골목길에서 작고 희미한 빛의 파편 같은 것이 번뜩였다. 맞아, 그때 시를 하나 썼었던 것 같아 라고 중얼거리며 나는 옛글들을 모아놓은 상자를 꺼내 뒤지기 시작했다. 이건가? 색 바랜 대학노트 속에 깊숙이 접혀있는 몇 장의 종이들이 있었다. 그것들을 꺼내 펼치자 그중 하나에 '유월 아침엔' 이란 시가 적혀있었다. 그래 이거구나. 나는 무척 반가웠고 무슨 귀한 문서를 찾아낸 듯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91년, 정확히 24년 전에 써놓은 시(詩)였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4년째 되던 그때에 나는 열심히 믿음 생활을 하고 있었다. 환갑도 못 지내고 돌아가셨지만 어머니는 소천하시면서 하늘 문이 열리는 것을 우리들에게 보여주셨다. 하늘나라로 들어가시는 어머니를 두 눈으로 똑바로 목격하였기에 하나님에 대한 우리 내외의 믿음은 그 뒤로 더욱 깊어만 갔다. 몹쓸 병환으로 어머니의 육신은 쇠잔할 대로 쇠잔해지고 고통으로 인해 망가질 대로 망가졌었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 어린애보다 순진무구한 함박웃음을 우리 모두에게 안겨주면서 활짝 열린 하늘 문으로 들어가시던 어머니의 모습은 위대한 반전이었고 빛나는 승리였다. 힘들고 어려운 삶의 고비를 만날 때마다 어머니의 마지막 모습은 항시 우리에게 힘과 믿음을 회복시켜주었다. 우리 형제들에게 육신의 생명을 주셨던 어머니는 돌아가시면서 다시 영적인 생명을 주고 가셨고 그렇기에 우리 모두는 더욱 어머니를 사랑하게 되었다.
91년 그때엔 어머니를 통해 받은 그 믿음이 내 속에서 한창 자라고 있었을 때였고 그 믿음의 눈으로 세상의 모든 것을 보고 있었기에 아마도 이런 시를 쓸 수 있었나 보다.
유월 아침엔 (91. 6. 22)
유월 아침엔
푸른 잔디밭 위로 쏟아져 내리는 햇살 속에서
하나님 당신의 모습을 봅니다
고마우신 하나님, 파란 하늘엔 흰 구름 한가로운데
透明한 햇살 속 두루두루 분주한 당신의 손길
삶에 닳아 헤어진 가슴들을 찾아 어루만져 주십니다
가슴 가슴 모두의 가슴
하나님,
햇살보다 넓고 고르신, 햇살보다 밝고 따스하신 恩寵으로
굳게 닫힌 가슴들을 열어 주소서
유월 아침엔
푸른 나뭇잎 사이로 넘나다니는 바람 속에서
하나님 당신의 숨결을 느낍니다
고마우신 하나님, 먼 산 푸른 숲은 고요로운데
보이지 않는 바람 사이 살풋살풋 속삭이는 당신의 숨결
삶의 騷音으로 지친 귓가에 내려앉아 주십니다
귀 귀 모두의 귀
하나님,
바람보다 크고 빠르신, 바람보다 넓고 부드러운 恩寵으로
굳게 닫힌 귀들을 열어주소서
우리 모두의 가슴이 열리고
우리 모두의 귀가 열리면
하나님
이 땅엔 유월 아침보다 아름다운 평화가 찾아들고
열린 가슴과 열린 귀로 하나님 당신의 恩寵을 온전히 받고
그때엔 우리의 입도 열려
하나님 당신을 讚揚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2015년 6월1일 석운 김동찬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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