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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친구 시인' - 22년 전 나는 무엇을 알았기에 이런 글을 써놓았을까?

석운 2017. 9. 6. 20:40

지난 토요일 저녁 아내가 해 준 맛있는 저녁을 먹고 행복한 마음으로 내 방에 올라와 습관처럼 음악을 틀고 컴퓨터를 켰다. 문학회 카페에 들려 여러 회원님들의 귀한 글들을 읽다가 Lara님이 한 줄 메모 글에 써놓은 '거친 바람 소리를 들으며 잠을 청하는 날이면 웬 지 모를 죄책감이 서랍을 열곤 한다' 라는 글이 내 눈을 찌르듯이 들어왔다. 그리곤 나도 급작스레 웬 지 모를 죄책감(혹은 부끄러움)에 사로잡혀 컴퓨터 한 구석에 잠들어있는 정말 오래 전에 써놓은 글들이 있는 서랍(파일)을 열어 보았다.


참 오래 전 젊었을 때 써놓은 것들이었지만 시도 있었고 수필도 있었고 여러 가지 단상 모음들이 잡다하게 있었다. 써놓긴 했었지만 스스로 부끄러워 그리고 내놓을 용기도 없어 서랍 속에 꼭꼭 닫아놓고 몇 십 년이 지나간 불쌍한 내 분신들이었다. 그리고 나서 무심하게 지나간 세월이 참 오랜데 오늘 'Lara'님의 메모 글 한 줄이 별안간 비수같이 내 마음을 찔러 서랍을 열게 했으니 참으로 글의 위력이란 대단하다. 이것저것을 읽어 보다가 22년 전에 써놓았던 '내 친구 시인'이란 글을 보면서 이곳 뉴질랜드로 오기 전엔 자주 만났던 그 친구 생각이 너무도 간절하게 나기에 여기 그 전문을 소개한다.


다른 시인들의 시들은 읽기도 많이 하고 감히 분석도 많이 했지만 막상 내가 쓴 시에 대해서는 과연 이것이 시가 되는 것인지에 대해서도 자신이 없다. 그날(92629) 나를 찾아왔던 내 친구 시인(그는 '목마와 숙녀'로 유명한 박인환 시인의 아들이다)과 대낮부터 퍼 마시고 돌아온 늦은 밤에 '요샌 마셔도 취하지도 않아'하며 쓸쓸하게 돌아서 가던 그 친구 생각이 나서 써놓았던 글이다.


 

내 친구 시인

 

남쪽에서 비소식이 전해 왔던

6월의 어느 오후

열어 놓은 창() 사이를 드나드는 바람처럼 문득

내 친구 시인이 나를 찾아왔다.

 

쓰알 놈의 자슥들 나 오늘부터 실업잘세

이따가 한잔 어때 하며 털퍽 주저앉는

그의 모습에서 유독 불거진 배가 나의 시선을 사로잡았고

나는 씁쓸히 웃었다

 

한두 번 때려 친 직장이 아니었기에

그의 말은 이미 뉴스가 될 수 없었으나

왠지 그 오후 나는 선뜻 그의 얼굴을 마주 할 수 없었다

 

배 말인가

쓰알 놈들 하고만 있었더니

()는 안 나오고 배만 나와

내 시선을 느꼈던지 뒷머리를 극적 거리며

그가 말했다

 

순간 나는 배를 움켜쥐고 웃었다

눈물이 찔끔찔끔 하도록 웃었다

왜 그래 이사람

머쓱해진 그가 야단맞는 어린애의 눈길로 나를 보았을 때

나는 무작정 그의 손을 끌고 밖으로 나왔다

 

남쪽 어디선간 비가 내리고 있을 그 오후

우리는 대낮부터 마셨다

배가 나오고 머리카락이 듬성듬성한 두 사내가

부끄러움도 없이 시()를 이야기하며

술이 목젖까지 차도록 마신 그날은

참으로 오랜만에 시인(詩人)의 친구가 된 날이었다. (92.6.29)


2014.2.8 석운 김동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