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안(老眼)
젊었을 땐
스물 아래의 여인들만 소녀로 보였다
언젠가부턴
서른 아래의 여인들까지도 소녀로 보였다
요즈음은
모든 여인들이 소녀로 보인다
노안(老眼)에 비친 세상은 모두 아름답기만 하다
**** **** **** **** ****
나이 들면 무엇보다도 먼저 눈이 나빠진다고 한다.
다행히 나는 아직 그렇게 눈이 나빠지지 않았다. 책을 볼 때는 안경을 써야 하지만 일상생활에서는 큰 불편이 없다. 참 고맙게 생각한다. 내 나이가 되면 많은 사람들이 책을 보면 눈이 피로해져서 책을 제대로 읽을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을 듣는다.
언젠가 나도 그렇게 될 지 모르지만 그렇게 되기 전에 조금이라도 더 많은 책을 읽고 싶다. 누군가는 죽음의 자리에서 침상에 둘러선 이들에게, ‘나에게 죽음이란 더 이상 모짜르트를 들을 수 없게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아직 죽음까지는 생각하기 싫은 나로서는 늙음에 대해서 말하라면 ‘늙음이란 더 이상 듣고 싶은 음악과 읽고 싶은 책을 가까이 못 하는 것’이라고 답할 것이다.
역설이겠지만 늙지 않기 위해서라도 나는 더욱 더 음악과 책을 가까이 할 것이다. 그리고 넓은 의미에서의 책(冊)인 이 세상의 아름다운 것들을 더 많이 보기 위해서 보다 크게 눈을 뜨겠다.
그 때, 크게 뜬 내 눈에 들어온 세상의 모든 여인들의 모습이 몽땅 소녀로 보인다면 세상은 얼마나 아름다울까? 이런 생각을 했을 때 떠오르는 시(詩) 한 편이 있었다.
찻집 (에즈라 파운드)
그 찻집의 소녀는
예전만큼은 예쁘지 않네
8월이 그녀를 지치게 만들었지
예전만큼 층계를 열심히 오르지도 않네
그래, 이 소녀 또한 중년이 되겠지
우리에게 머핀을 가져다 줄 때
풍겨주던 젊음의 반짝임도
이젠 더 이상 풍겨 나오지 않겠네
이 소녀 또한 중년이 되겠지 (拙譯)
이 시(詩)를 쓸 때의 에즈라 파운드의 나이가 얼마나 됐었는지 나는 모른다. 지금의 나만큼 나이가 들었었는지 아니면 더 또는 덜 들었었는지 모르지만 찻집의 소녀를 바라보는 눈만큼은 그와 나 사이에 상당한 차이가 있다. 내가 이 시를 처음 읽었던 때는 40년도 더 전이었다. 그 때도 지금도 이 시에 나오는 찻집의 소녀를 보지 못했지만 내 심안(心眼) 속의 찻집의 소녀는 그 때나 지금이나 영원한 소녀로 남아있다.
그런 의미에서 위대한 시인으로서의 에즈라 파운드와 비교해도 지금 세상을 바라보는 노안(老眼)만큼은 내 쪽이 더 낫지 않은가 감히 생각해 본다. 내 노안 속에선 세상의 사물들이 결코 늙지 않고 아니 오히려 날마다 더욱 젊어지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에즈라 파운드의 ‘찻집의 소녀’에 대항하는 시를 하나 써보고 싶었다. 그래서 쓴 시가 노안(老眼)이란 시다.
2015.2.15 석운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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