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토요일 산우들과 더불어 오쿠라 부시를 걸었다.
몇 번씩 갔었던 곳이지만 모처럼 날씨도 좋았고 밉상맞도록 밑자리 질긴 겨울이 드디어 그 긴 꼬리를 감추고 퇴각하는 것 같아 가벼운 기분으로 카메라를 손에 들고 걸었다. 유독 추위를 많이 타는 아내도 이날은 머리 위로 내려쪼는 봄햇살의 따사로움이 마냥 즐겁기만 한지 걷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봄을 알리고 싶어하는 숲은 여러 모양과 색깔 그리고 소리로 우리들을 맞았고 더없이 푸르른 봄하늘은 때로는 우리들의 어깨를 스칠듯 가볍게 우리들의 머리 위를 떠다녔고 언덕 위에 올라설 때마다 먼 데 가까운 데서 바다는 그 넉넉함으로 팔을 벌려 우리들을 포옹하였다.
목적지 바닷가에 가서 둥그렇게 둘러앉아 다같이 점심을 먹고 덕담들을 나누다가 돌아올 때엔 물빠진 갯벌 위로 걸어오면서 굴도 따고 또 소라 껍질도 줍고 하였다. 잘 찍을 줄 모르는 사진이지만 나는 틈 날때 마다 들고 간 카메라의 셔터를 눌렀다. 뷰 파인더를 통해 들어오는 풍경도 사람들도 왠지 실제보다 더 다정하게 느껴졌다.
돌아와서 사진들을 정리하면서 생각나는대로 써보았다. 찍을 때는 아무 생각없이 찍었지만 찍고 나서 컴퓨터에 옮겨 놓은 사진들은 잘 된 사진이던 아니던 돌연 나의 세계로 들어온 작은 생명체인양 정감이 갔다. 그 정감을 살려서 작은 글들을 달아보았다.
워낙 성정이 게을러서 글쓰는 연습을 잘 못하는데 이런 식으로 글 쓰는 연습을 해보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으로 하나 하나의 사진에 글을 달아보니 나름대로 기분이 좋았다.
다 된 글을 산행 카페에 올렸더니 산우들이 좋아하기에 오문회 회원님들과도 나누려고 여기 올려본다.
1. 출발
봄을 찾아 나섰나
겨울을 뿌리치기 위해 나섰나
계절의 징검다리를 건너는 발걸음이 가볍다
다리 저쪽엔 봄이 손짓하고
다리 밑으론
유난히 길었던 겨울의 잔해가 흘러간다
빈 길이 우리를 맞는다
문득 길의 속삭임이 들린다
죄송해요
아직 손님 맞을 차비를 제대로 못했어요
겨울은 상기도 머리 위에서 윙윙거리고
서둘러 나온 잎들은 아직 여리고
부시시 몸 매무새 챙기지도 못했지만
그래도 당신들 오신다기에
급히 몸 열어 맞는답니다
3. 건너 마을
먼데 봄 아지랑이가 보일 만도 하다
아직 잎 못 틔운 나무는
벗은 몸 아랑곳없이
마음껏 기지개를 켜고
물 건너 벌판의 푸르름이 싱그럽다
마을을 향하는 길의 굽이침도 싱그럽다
그 위를 달리는 봄기운도 싱그럽다
4. 풍경
바다, 벌판, 저 멀리 마을, 그리고 사람들
일상에서 조금만 떨어져 나가면
우린 모두가 풍경이 된다
무슨 생각을 하며 걷던
무슨 말을 하며 걷던
오늘 우린 한 폭의 풍경이 되기 위해
일상에서 떨어져 나왔다
5. 세 남정네
어디를 가시나
초록 벌판을 내딛는
세 남정네의 발걸음이 여유롭다
사위(四圍)의 초록은 몸을 감싸고
봄은 벌판 가득 질펀하니
발길 인도하는 작은 길이 정겹기만 하다.
6. 여인 하나
가던 걸음 잠깐 멈추고
바다를 보는 여인 하나
오늘 잔잔히 밀려드는 바다의 물결이
저 여인의 마음결에 무슨 파문을 일으켰는가
물결 따라 마음결 따라 추억이 넘실거리고
여인의 눈길은 보다 깊은 바다를 향하고
멈춘 걸음은 순간의 영겁인 양
작은 그림자로 서있는 바닷가의 여인
7. 물방울
애초부터 바다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처음엔 그냥 작은 물방울이었다
그 물방울들이 모여
냇물이 되고 강물이 되고
더 낮은 곳으로 모이면 바다도 되었다
우리의 삶도 처음엔 작은 물방울이었으리라
낮은 데로 모이다 보면 바다가 될 수 있는
작은 물방울,
누구의 삶도 애초부터 바다로 태어난 것은 아니었다
8. 새들
새들이 날아들 때
바다는 비로소 온전한 바다가 된다
새들은 물결모양으로 날고
바다는 새들 모양으로 물결친다
바다 위를 나는 새들은 하늘을 보지 않는다
바다가 곧 하늘이다
그리고 그때
바다는 온전한 바다가 된다
9. 봄소식
저기 봐 저기 좀 봐요
초록의 구릉너머 어딘가로부터
봄이 다가오는 것을
눈밝은 여인들은 보았나 보다
두런거리는 봄소식에
나물 캐던 여인은 고개를 들고
마음 바쁜 여인은 전화를 들고
고향의 가족들에게 봄을 전하고
10. 봄 잔치
나무 밑 풀밭 위에
잔치가 벌어졌네
가깝게 다가앉은 산우들의 마음새도 정겹고
가깝게 내려앉는 봄 하늘의 푸르름도 정겹다
이것 좀 들어보세요 여기 또 다른 것도요
주고받는 손길 구수한 덕담 속에
한낮의 봄 잔치는 따사롭기만 하다
11. 말타는 여인들
봄 바닷가
말 타는 여인들의 모습이 아름답다
왜 갑자기 바다를 향해 섰을까
누구라도 그 몸 속에 생명의 바다를 지닌 여인들
바다를 향한 각별한 향수가 그녀들을 세웠을까?
문득 눈 내리는 밤 숲과 호수 사이에
말을 멈췄던 시인이 생각난다
그녀들의 말들도 시인의 말처럼
무슨 일이냐고 목방울을 흔들고 있지 않을까?
12. 담배 한 대
때로는 나도 맛있게
담배 한 대를 피고 싶다
피어 오르는 연기 속에 먼 옛날 젊음을 다시 느껴보고 싶다
건강이 우상이 되어버린 멋없는 세상
이 봄날 숲 속에선 모두 훌훌 내려놓고
저렇게 멋진 포즈로
담배 한 대를 피워도 좋으련만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젊음만을 한하고 있다
13. 나물캐는 여인
하늘거리며 오가던 봄바람도
잠깐 숨을 고르는 곳
한낮의 햇볕을 큰 나무가 넉넉히 가려주고
그 아래 나물 캐는 여인의 모습이 너무도 정겹다
손은 나물을 캐고 마음은 봄을 캐고
여인의 부드러운 손길이 닿으면
모든 풀들이 어느덧 봄나물이 된다.
아오테아로아
희고 긴 구름의 나라
봄 길을 걷다 걷다
높은 곳
어디선가 날 부르는 소리 있어
고개를 들어 만난 허공엔
양 한 마리
하늘을 날고 있었다
15. 또 하나의 풍경
갯벌
바다
수평선 넘어오는 돛단배 하나
바다 위에 또 구름의 바다
그 아래 먼 추억처럼 희미한 산의 모습
이 모든 것이 다 있다 해도
이 그림은 풍경이 될 수 없었다
생각에 잠겨 걷는 한 여인이 들어오기 전까지는.
16. 이제는 돌아 갈 때
이제는 돌아갈 때
올 때는 산을 넘어왔지만
갈 때는 물 빠진 갯벌을 밟고 간다
가다가 굴을 만나면 굴을 따고
멋진 소라 껍질을 만나면
바닷소리와 같이 줍고
돌아가는 발길이 봄바람마냥 가볍다
17. 내 눈에 비친 세상
물에 어린 초록 벌판
물은 벌판의 초록까지 담아내는데
벌판 위의 구름 그림자
흰 색은 어디 가고 어둠만 남아있다
문득 내 눈에 비친 세상을 생각해본다
사람이던 물건이던
내 눈은 있는 그대로 담아낼까
있는 그대로 내 맘에 전해 줄까
물에 어린 초록 벌판 다시 눈에 어린다
18. 갯벌 위에서
돌아가던 갯벌 위에서
왜 갑자기 멈추었을까
누군가는 전화를 하고
누군가는 갯벌을 카메라에 담고
누군가는 그 모두를 카메라에 담으려 하고
끝나가는 하루의 산행이 아쉬운가 보다
뒤돌아 그들을 바라보는 우리 모두의 마음은
그냥 흥겹기만 했다
이제 다 왔어요
여기만 나가면 끝이에요
한 손엔 지팡이
한 손엔 서로의 손
마지막 길을 나서는
두 여인의 모습이
몸 기대어 피어나는 꽃들마냥 정겹다
하루의 산행은 이렇게 끝나지만
그 속에서 피어난 정(情)의 향훈은
우리의 삶 속으로 퍼져나간다
2014. 10. 13 석운 김동찬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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