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모음

시심(詩心)

석운 2017. 9. 8. 11:02

한때는 소설이 쓰고 싶었다.


그런데 그때도 나는 나를 잘 알고 있었다. 대상이 무엇이든 결코 그걸 오래 잡고 있지 못하는 나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기에 나는 안 될 걸 알고 있었다. 그래도 그때는 왜 그렇게 소설을 쓰고 싶었는지 단편이라면 쓸 수 있을 거라고 애써 스스로를 설복하곤 했었다.


그때, 거의 오십 년 전의 그때, 습작 노트들이나 일기장을 살펴보면 꽤나 많은 단편소설들의 시작부분들이 남아있다. 지금 보아도 꽤나 근사하게 시작된 글들도 있다. 그러나 어느 하나도 대학 노트 세 페이지를 넘어 쓴 것은 없다. 대개가 그 정도에서 아직도 미완으로 남아있다. 심심할 때 그것들을 읽으면서 나는 씁쓸하게 혼자 웃는다.


그때나 지금이나 무언가를 써보고 싶다는 마음은 항상 갖고 있다. 아마도 그 마음은 문필가들을 향한 막연한 동경심 같은 것이 아닌가 한다. 그렇기에 연필을 잡고 무언가를 끼적거리기는 해도 재주도 집중력도 끈기도 없기에 지금까지 글다운 글 하나도 못쓰지 않았나 한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어떻게 하랴. 이제 내 성격을 바꾸거나 없는 재주를 발굴해낼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무언가를 써보고 싶다는 마음마저 버릴 수도 없고 버릴 마음도 없다. 그냥 살고 있는 한 아직도 살아있다는 걸 나 자신과 주변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서라도 무언가를 끼적거리고 싶다. 누군가의 말대로 참 영양가 없는 행동을 하고 있는지 모르지만 산다는 것이 어떻게 꼭 영양가 있는 짓만 하고 살 수 있으랴.


잠이 안 오면 책을 잡는다. 책을 잡고도 잠이 안 오면 그땐 컴퓨터를 켠다. 그리곤 무언가를 끼적거린다.

며칠 전 그날 저녁에도 잠이 안 왔다. 밤은 깊어가고 있었다. 그래서 무언가를 썼다.


시심(詩心)


시()는 밤의 한가운데에

내 숨소리 강렬히 의식 속으로 퍼덕거릴 때

희끄무레한 소음들의 번잡한 죽음이 한낮을 안고 사라졌을 때

내 뒷덜미에서 그림자처럼 번져 나와

생명으로 피어난다


낮 동안의 일들은

       -반투명 태양아래서의

        고민스런 배설과 분노

        그리고 눈물처럼 빛나는 땀방울들과의 엄숙한 대화-

저녁나절의 쑥스런 독작으로

애써 상쇄하고

자버린다


한밤엔 꼭

유령처럼 일어난다 그리곤

벽시계의 고동소리에 맞춰

고개를 끄덕이며 나와의 대화를 즐긴다

그때 시심(詩心)

수줍은 암컷처럼 내게 다가든다

         -그 낯익은 체취 부드러운 촉감

          나는 관능의 바다에 빠진다

          돛처럼 퍼덕이는 한 장의 백지를 부여안고-


밤은 더욱 깊어만 가고

사위를 조여 오는 밤의 숨소리

나는 눈을 감고 내 몸은 온통 귀가 되어

내 가슴을 넘나드는 숨소리를 듣는다

밤의 숨소리

나의 숨소리

거칠어지는 숨소리

가위 눌린 듯 가위 눌린 듯

나는 꼼짝도 못하고 앉은 자리에서 땀범벅이 된다.


문득

축축한 기운에 몸서리치며 눈을 뜨면

어느덧 희끄무레하게 창가에 다가온 새벽

내 몸은 격전을 치른 병사처럼 피곤하고

내 두 손엔

아직도 땀방울 얼룩진 초라한 백지 한 장


2016.2.13 석운 김동찬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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